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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울동노회 창립
원래 서울노회는 1911년 12월 경기충청대리회가 경기충청노회로 출발한데서 그 뿌리기를 찾을 수 있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경기충청노회는 교세가 약하였기에 경기도와 충청도를 한 노회 단위로하여 창립되었다
대리회장 언더우드목사의 사회로 개회 되었으며, 임원은 회장 민노아, 부회장 곽안련, 서기 김규식 등이 선임되었다.
민노아는 선교사로서 청주선교부 소속이었고, 곽안련도 선교사로서 서울선교부 소속이었다.
이렇게해서 출발한 경기충청노회는 노회장들과 개교회에 속한 장로와 목회자들의 협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계속 증가하는 교인들과 교회를 지도하기에 한계를 느끼자 1924년 9월 총회에서 경기충청노회를 분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경기충청노회는 1924년12월19일 서울 안동교회에서 조직회장 김영구목사의 사회로 경기노회를 분립하였다.
이렇게하여 출범한 경기노회는 그후 발전을 거듭하던 중 경기노회와 경성노회를 분립하기 위해 1932년 제21회 총회에 헌의하게 되었다.
1937년 10월 승동교회에서 경성노회가 출범하게 되었으며 1945년 11월 해방과 함께 경기노회와 경성노회가 재 통합하면서 경기노회라 브르게 되었다.
1954년 11월 한국 기독교 잘오회의 이탈로 노회가 분립되었다. 다시 1959년 9월 44회 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문제로 소란이 일어나자 더 이상 개회하지 못하고 결국 합동측이 이탈해 나감에 따라 경기노회도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립되었다.
경기노회가 안정된후, 개교회도 안정 속에서 성장하였다. 1966년 11월 경기노회는 서울을 중심으로한 한강 이북과 인군 군소 도시를 포함해서 서울 노회로 명명하고 그 대신 경기 노회는 한강 이남 지방을 맡았다.
원래 경기노히는 개명하기 전에는 한남 노회로 불렀으나 이후로는 경기 노회가 서울노회의 명칭을 사용하므로 한남노회라는 명칭은 없어지고 경기노회라 불렀다.
1966년 11월22일 연동교회에서 제87회노회가 개최되었을 때 총회의 결정에 따라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경기노회 명칭은 한남노회가 사용하고 우리는 서울노회라는 새 명칭을 사용하게 되는 바 이는 교회 확장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결과였습니다(서울노회편 서울노회 14쪽)
해가 갈수록 서울 노회는 계속 성당하게 되었으며 총회가 모일 때 마다 장자교단 내의 장자노회답게 총회를 이끌어 갔다.
서울노회 총대들은 수도노회 답게 더 열심히 개 교회를 섬기면서 성장은 물론 교회설립하는 데도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 서울노회와 3개 노회 분립안 헌의
이렇게 경기노회에서 서울노회로 명칭을 바꾼 그해 11월22일 제87회 정기노회 연동교회에서 총회원 310명중 출석회원 목사 118면 목사 92명으로 합계210명이 모여 회장 이성규목사의 사회로 개회 되었다 이때 광릉천교회 이완재목사께서 동북시찰 경내에 속한 39개 교회를 시찰로 묶어 노회로 분립해 달라는 청원을 서울노회 노회장에게 헌의하게 되었다.

< 광릉천교회 당회장 이완재씨와 동북시찰내 39교회 대표로부터 동남 동북 경북등 세 시찰을 일원으로하여 노회를 분립케 해달라는 헌의 건과 이 헌의에 대하여 경북시찰에서도 찬동한다는 경북시찰장 김동건씨의 경북시찰내 18교회를 대표한 동의와 본 노회 전번 회의시 유안했던 노회분립 유안건은 연구위원 11인을 선정하여 금번 회기 중에 연구 보고케하되 연구위원은 강신명, 김동건, 박태경, 이성규,이태준, 김종대, 배명준, 강만우, 이창로, 최계득, 박부성 제씨로 하여 주심을 좋은 줄로 아오니,(1966.11.22. 서울 노회 87회 회의록)>

이와 같이 노회에서 분림 위원으로 공천을 받았던 위원들은 그 즉시 강신명목사의 소집으로 조직을 하게 되었다. 조직위원장에 이태준목사, 서기에 강만유장로가 선임 되었으며 , 나머지는 위원으로 함께 참여하였다.
1967년 5월16일 한양교회에서 모인 제 88회 정기노회에서 보고를 하려고 준비하였지만 위원들간의 약간의 의견차가 있어서 발표하지 못하고 한회기 더 연구하여 보고키로하고 다음회기로 넘기게 되었다.
1968년 5월14일 제90회기가 충무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때도 역시 노회 분립안을 더 연구해야 한다는 위원장 이태준목사의 보고를 받고 더 연구하기로하였다. 이 때 분립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김동건 목사가 지방으로 이명해 가자 시찰장으로 오석희 목사가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서울노회가 해가 갈수록 비대해 가고 더 이상 연구만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위원장 이태준목사는 1968년 8월2일 임시노회시 위원회 위원들과 임원회를 소집하고 연석회의에서 분립안을 토의하엿다. 이때 토의했던 노회 분립안은 1968년 11월19일 연동교회에서 모이는 제91회 정기노회에 결의 되었다.
<노회분립위원이 보고한 별지안 중 제 1, 2안만 갖고 투표하기로한 결정데로 투표할 때 투표위원으로 다음 제시를 회장이 자벽 발표하다 투표위원 이태용, 김봉호, 백의석, 김종숙,박태경, 기표는 아라비아숫자 1,2로 표기하기로 하고 강신명, 최석주 두 목사로 기도케하고 투표한 결과 제1안 134표, 제2안 72로 제1안이 가결되다, 노회명칭에 대하여 서울노회는 정통적 명치으로 그대로 두고 다른 두노회 명칭은 명년 5 월 노회시 까지 보류하기로 가결하다(1968년 11,19.서울노회제91회 회록)>

이때 가결된 1 안은 다음과 같다
1.서울노회 : 중조시찰, 성동시찰, 동남시찰로 이루어졌고
종중시찰은 교회수 15개처 기관수 4개처 세례교인수 8,820명 목사수 41명이며,
성동시찰은 교회수 18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2,044명 목사수 21명이며
동남시찰은 교회수 28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663명 목사수 6명이며
이 소계는 교회수 61개처, 기관수 4개처 세례교인수 11,527명, 목사수 68명이다

2. 서울동노회 : 동대문시찰 성북시찰, 동북시찰로 이루었고
동대문시찰은 교회수 15개처 기관수 1개처 세례교인수 2,900명 목사수 19명이며
성북시찰은 교회수 15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1,226명 목사수 21명이며
동북시찰은 교회수 39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1,187명 목사수 15명이며
이 소계는 교회수 69개처 기관수 1 개처 세례교인수 5,313명 목사수 55명이다

3. 서울서노회 : 용산시찰 마서시찰, 경북시찰로 이루었고
용산시찰은 교회수 13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1,870명 목사수 16명이며
마서시찰은 교회수 25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2,315명 목사수 32명이며
경북시찰은 교회수 18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수 451명 목사수 5명이며
이 소계는 교회수 56개처 기관수 0개처 세례교인 4,636명 목사수 53명이다

원래 2안은 서울 노회와 서울동노회로 분할하자는 안이었다 서울노회는 종중,마서, 용산, 경북시찰로 하자는 것으며 서울 동노회는 동대문 성동 성북 동북 동남 시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히원들은 1안을 택하여 서울노회 서울동노회 서울서노회로 하기로하였다.

 
3. 서울동노회창립
1) 3개노회 분립예배와 서울노회
서울노회 제29회 정기노회가 1968년 11월18일 연동교회에서 회집할 때 경내에 속한 교회수는 186,기관수 5, 세례교인수 21,476, 목사는 176명이었다.
당시 교단내에서는 최대의 노회였다.
이렇게 비대해 가자 노회로서는 그 넓은 지역을 관리하기에 힘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했던 서울노회에서는 영락교회에서 모인 1969년 9월25일 제54회 총회에서 서울노회에서 헌의했던 3개노회 분립안이 결의 되었다.
이렇게 분립안이 결의되자 서울노회는 종전의 회기수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으며 새로 분립해야 하는 노회는 총회에서 허락하여 준대로 서울동노회는 미암교회 이태준 목사가 맡았으며 서울서노회 소집책은 유호준 목사가 맡았다.
한편 총회에서 3개노회 분립안에 의해 준비를 하던 중 드디어 역사적인 분립을 위해 1969년 11월18일 10시30분에 새문안교회당에서 서울노회가 서울노회, 서울동노회, 서울서노회 3노회 분립하는 예배를 서울노회장 김성수목사의 사회로 드렸다.
이날 3개노회 분립예배는 그 어느때 보다도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다. 용산도원동교회 김성수목사의 사회로 진행 되었을 때 회중을 대표하는 기도는 새문안교회 강신명목사가 하였으며 설교는 증경총회장이며 영락교회 당회장인 한경직목사가 맡았다 축사는 제54회 총회장인 안광국목사가, 두번째 축사는 증경총회장이며 인천제일교회 당회장인 이기혁목사가 맡을 정도로 증경총회장, 현직 총회장이 이처럼 대거 참여했던 일은 한국교회 노회분립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새문안교회에서 정성껏 준비된 중식을 나눈 다음 서울동노회 회원들은 서울노회와 서울 서노회 회원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동대문 밖에 있는 동신교회에 모여서 소집책 이태준목사의 사회로 개회 되었다.
 
2) 서울동노회 창립예배와 조직
1969년 11월18일 오후1시 역사적인 서울동노회창립 노회가 동신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날 동신교회 정문에는 축하하는 현수막이 높이 걸여 있엇으며 이미 준비위원들의 수고로 교회당 내부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동노회 제1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소집책인 미암교회 이태준목사의 인도로 개회예배가 진행되었다
이날의 특별순서는 대광중고등합창단이 맡았다
동신교회 당회장 김세진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떡분배는 박희룡, 홍영기, 노상익, 최재식, 잔분배는 강광섭, 조요섭, 임치재 홍일표장로들이 었다) 이어서 회무처리에 들어 갔으며
각시찰별 회원은 시찰별로 점명한 결과 다음과 같았다

1.동대문시찰
목사 : 고용윤. 이춘방. 이의호. 노충섭. 장영호. 김세진. 이석근. 홍동근. 이신옥. 황금찬. 박성진. 백용종. 김이봉. 우영락. 김홍주. 길영찬. 변동일. 임택진. 김재호. 김창주.
장로 : 강광섭. 한영직. 신석승. 홍영기. 이호일. 임찬호. 이달준. 김태길. 김성섭. 윤영춘. 김인기. 박창서. 남기섭. 백윤종. 문광일. 유성덕. 문인국. 임용섭. 강화중. 김재호. 박희룡. 김화용.

2. 동북시찰
목사 : 김광석. 김종구. 김거북. 강상우. 최정선. 이규택. 소도열. 최병두. 김승호. 이성규. 정행업. 이영만. 강도순. 한태인. 이치백. 강석일. 강인수. 이재철. 최덕한.
장로 : 백두흠. 최호남. 옥지권. 박문진. 노상익. 이강주. 이준영. 김충묵. 김호익. 추광선. 이기열. 홍일표.

3.성북시찰
목사 : 백한걸. 이태준. 홍성은. 정인희. 한기익. 이응화. 조남기. 이대근. 이태용. 강재철. 황광운. 김형학. 용희창. 나긔환. 오영환. 박정식.
장로 : 최재직. 송재남. 전요한. 김기해. 조용섭. 문기석. 황정식. 문득봉. 김기환. 이규석. 임치재. 김문협.

4. 기타 의정부교도소
김화중. 김종수. 이동섭목사
이로서 서기가 회원을 점명하니 목사회원 54명, 장로회원 합계95명이 출석하여 개회의 정수가 됨으로 창립노회를 개회하였다.

당시의 임원선출은 다음과 같았다

회장: 장영호목사. 부회장: 임택진목사
서기: 강도순목사. 부서기: 길영찬목사
회록서기: 나긔환목사. 회록부서기: 조요섭목사
회계: 황정식장로. 부회계:김화용장로(1969.11. 18,노회촬요1쪽)